공자의 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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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私學

당시 주목할 만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공자가 계씨 집안의 직무를 그만두고 사학私學을 세운 것이다. 사실 계속 관직을 유지할 생각이 있었다면 10여 년의 관직 경험과 공적, 재능, 학문, 아울러 겸손한 성품으로 그의 앞날은 대단히 밝았다. 하지만 공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이후 50세에 이르러 특수한 정치적 상황이 다시 관직으로 불러내기까지 공자는 정계와 거리를 두었다. 이렇듯 공자는 줄곧 관직에 나아가려는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공자가 단지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면 그의 나이 20세에 이미 스승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는데, 왜 10여 년이 지나서야 사학을 세울 결심을 하였을까?

이에 대해 공자는 일찍이 “옛것을 알고 새로운 것을 터득하면 스승 노릇을 할 수 있을 것이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논어> 위정爲政편)라고 말하였다. 온고溫故는 옛것을 익힌다는 뜻이고, 지신知新은 새것을 안다는 뜻이다. 진정한 스승은 지식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스승은 어떤 사실에 대한 지혜와 안목,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속된 것에 대한 가치 판단력이 있어야 한다. 학생들에게 기존의 지식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것의 터득知新’인 것이다. ‘옛것을 알고溫故’ 이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터득’해야만 스승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는 20세 때 단지 옛것을 아는 단계였다가 서른에 이르러서야 새로운 것을 터득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 경지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공자는 스승이 되었다.

본래 공자는 계씨 집안의 가신을 지냈고, 국가의 큰 의례에 참석하여 제사 지내는 일을 도왔으니 그 지위가 상당하였다. 다만 그는 학문에 뜻을 두었으므로 학문의 진전에 전력을 다하였다. 훗날 제자 자하子夏는 “벼슬을 하면서도 남는 힘이 있으면 배우고, 배워서 인격과 학문이 넉넉하면 벼슬을 할 것이다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사이우즉학 학이우즉사)(<논어> 자장편)라고 말하였다. 배우다學는 이 문장의 전체를 관통하는 것으로, 벼슬을 하는 것仕보다 훨씬 중요한 위치에 있다.

당시 공자는 학문에 더 큰 열정을 쏟아 부었는데, 벼슬과 학문이 서로 충돌하자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관직을 버렸다. 자신의 직업과 해야 할 일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을 지향하면서 직업이 그 본래 취지를 손상시키지 않도록 한 것이다.

공자가 사학을 세운 목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신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공자는 “육포 열 묶음 이상을 가져오는 사람이면, 가르침을 주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공자의 『춘추春秋』를 해설한 주석서 <좌전> 술이편)라고 말하였다. 학생이 마른 육포 열 줄의 작은 예물이라도 가져오면 공자는 그에 상응하는 가르침을 베풀었다. 학비에 일정한 기준을 정하지 않았지만 한 묶음은 최저 기준으로, 빈곤한 가정의 학생을 배려한 것이다. 귀족의 자제나 자공처럼 부유한 학생에게는 찬조금 등 자금을 지원받았다.

둘째, 공자 스스로 학문을 탐구하고 도의를 추구하기 위해서였다. 한편으로 가르치고, 또 한편으로 학문을 연마하면서 그의 학문은 더욱 성장하였다. 가르치는 일은 학문을 진전시키는 데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셋째, 사학은 공자가 자신의 독특한 인생 여정을 펼쳐나가는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정치에 개입하고,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주장과 사상, 이상을 선전하고 실천할 수 있었다. 공자는 사학을 통해 자신의 직업과 사업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도를 찾은 셈이다.

넷째, 공자는 사학을 통해 자신의 인격적 독립과 정신의 자유를 확보할 수 있었다. 공자는 더 이상 다른 사람의 통제를 받지 않아도 되는 자유를 획득하였을 뿐 아니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독립적인 지식인을 키워낼 수 있었다. 독립적인 지식인 집단의 출현은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중국 사회에 도의道義를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며 확산시키려는 사람들이 생겨났음을 의미한다.

공자 이전에 세워진 학교는 모두 나라에서 세운 것으로, 관학官學이라 불렸다. 주나라 천자가 세운 학교도 있고, 제후가 세운 학교도 있었다. 그곳에서 배우는 학생들은 귀족 자제로, 주로 주례周禮나 <시경>, 기본적인 행정 능력 등을 배웠다. 반면 공자가 세운 학교는 개인이 세운 교육기관이므로 사학이라 불렸다.

  • 김광우. “공자의 사학私學.” 광우의 미술문학 사랑방, 21 Aug. 2021, blog.naver.com/misulmun49/222479477698. Accessed 30 Apr. 2024. 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