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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弟一篇 經文

弟一節

原文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며 在親(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

韓譯 대학(大學)의 도(道)는 명덕(明德)을 밝히는 데 있으며 백성을 친애(親愛)하는데 있으며 지극한 선(善)에의 머무름에 있다.

英譯, 弟一次 The way of the Great Learning is to enlighten the noble virtue, to relate closely with people (or to renovate), and to abide in the utmost righteousness.

大學之道

學問의 완성을 위하여 修得해야 할 道의 일컬음. 나아가 세계 평화를 뜻하는 「平天下」에로 이르는 길의 뜻이기도 함. 道에는 路, 理, 術등 여러가지 뜻이 있음. 明代 鄧退菴의 《四書補註備旨》등 몇몇 註解書에서는 道를 「學의 방법」 또는 「修養의 방법」 으로 풀이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理念으로서의 나아갈 길」 이라고 봄이 타당함.

明明德

첫 明字는 「밝히다」 라는 動詞. 곧 明德을 밝힌다는 뜻. 明德은 《詩經》 《書經》 에도 흔히 있는 말로 그 해석에 대하여 학자들의 見解가 區區한데 「사람의 本性속에 있는, 事理를 올바르게 인식하고 분별할 수 있는 밝은 才德」 이라고 보면 됨.

親(新)民

親民은 「백성을 친애함」 新民은 「백성을 새롭게 함」 의 뜻.

止於至善

「至善」 은 지극한 善, 最高의 善을 말하며, 여기에 머무른다는 것은 온 정신을 기울여 지극한 善의 境地에 몸을 두어 굳건히 이를 지킨다는 뜻임.

英譯, 弟二次 The way of education is to enlighten the mind, to be able to relate closely with other people (or to renovate people), and to abide in the utmost righteousness.

解設

「大學」 은 中國 古代로 부터 最高學府인 大學(태학)에서 다루온 學問이다. 이는 小學에 대하는 이른바 고등학문인데, 그 내용을 朱憙는 《大學章句》 序에서 「이치를 窮理하고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과 자신의 德을 쌓고 남을 다스리는 道理를 가르쳤다」 고 要約해서 밝혔다. 唐代의 孔穎達은 大學을 가르켜 「배움을 이루는 일을 論하여 그 나라를 다스리고 天下에 그 德을 밝힐 수 있게 한 것인데, 또한 明德으로 말미암는 바를 근본으로 하여 먼저 뜻을 정성되게 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것」 이라 했다.

朱熹는 「大學」 이란 「大人之學」 이라 했고, 王陽明도 이에 따랐다. 大人의 學問은 곧 大人을 養成하기 위한 학문이다. 그러면 大人이란 어떤 사람을 가르키는가. 이는 온전한 德을 갖춘 위대한 사람 곧 君子 또는 聖人과 같은 의미의 사람이다. 《論》 季氏篇의 「畏大人」 이란 말의 注에 「大人은 聖人이다」 라고 했거니와 王陽明은 「大人은 천지만물로써 一體를 삼는 者」 라고 했다. 이 설명은 곧 「仁」 에 優游하는 聖人을 가리킨 말이다. 君子가 才德이 있는 사람이란 뜻 외에 다스리는 지위에 있는 사람의 뜻까지 아울러 가지듯이 大人도 마찬가지로 「有德者」 와 「有位者」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政治는 有德者가 해야 되고 정치하는 사람은 또 반드시 有德해야 한다는 과거 동양인들의 관념의 일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德은 정치에 있어서의 手腕 이전에 인간적인 바탕이다. 결국 大人은 君子, 聖人과 마찬가지로 온전한 德性을 지닌 人間像으로써 治國理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는 資質을 갖춘 사람이라고 定義할 수 있다. 「大學」 은 곧 그러한 大人을 양성하기 위한 學問인 것이다.

原文에서 大學의 道는 明德을 밝히는 데 있다고 했고, 백성을 親愛하는 데 있다고 했고, 지극한 善, 최고의 善에 머무는 데 있다고 했다. 朱熹는 明明德, 親民, 止於至善을 三綱領이라 했는데, 이는 儒學의 理想的 目標이자 바로 「大學」이 모든 儒敎 理論을 包括 統攝할 수 있는 要諦이다. 따라서 이 三綱領의 뜻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明明德이란 무엇인가? 물론 明德을 밝힌다는 말이다. 明明德은 字意대로 이미 「밝은 德」인데 왜 「밝은 德」을 또 밝힌다는 것인가? 明德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德字의 뜻부터 풀어 본다. 德의 古字는 悳이다. 悳字는 直과 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直心, 곧 곧은 마음을 德이라 했다. 孔子는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直으로 사는 것이다」라고 했다. 삶의 외부적 현상은 食, 色으로 살아가는 것이지만, 삶의 내부적 본질은 直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 孔子의 人生觀이라고 말할 수 있다. 孔子가 말한 「直한 마음」이 곧 悳이다. 그것은 사람이 모두 공동으로 가지는 마음이므로 뒤날에 文字사용할 때 悳字에다가 두 人偏(久)을 加하여 德字가 되었다. 또한 그것은 사람이 태어날 때에 하늘로부터 얻은 것이라 하여 德字는 得의 뜻도 갖게 되었다. 《周易》 繫辭에 「天地의 큰 德을 生이라 한다」고 했다. 사람은 天地의 큰 德인 生을 얻어서 자기의 德을 삼았다. 그러므로 孔子가 말한 直은 곧 生의 德이라고 할 수 있다. 生의 德인 直은 단순한 正直의 뜻만이 아니다. 孔子가 말한 直은 自然한 것, 인간의 本性에서 나온 것, 사람의 「眞情의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자연한 진정의 흐름을 孔子는 仁이라고 생각했고 孟子는 좀 더 나아가 仁義라고 하여 이것은 하늘이 준 인간의 본성이라고 했다. 인간이 본성으로 지니고 있는 이 生의 德은 본래 순수하고 깨끗하다 하여 明德이라 했다.

일찌기 學者들은 明德의 해석에 대하여 각기 다른 見解를 보였다. 漢代 鄭玄은 明德을 「至德」이라 풀이했고 孔穎達은 「자기의 光明한 德」이라 했다.

다시 朱熹는 「사람이 하늘로부터 얻어 온 虛靈不昧한 것으로 모든 理致를 갖추어 온갖 일에 應해 가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의 「하늘」은 理의 根源으로서 本體論(ontology)的인 의미를 가진 形而上의 하늘을 말하고, 이에 「하늘」을 이끌어 오는 것은 人性을 우주 본체로써 근거짓는 태도이다. 「虛靈不昧」는 인간의 마음이 그렇다는 말이다. 하늘로부터 받아 온 인간의 마음은 昏闇하지 아니하고, 靈明하다는 것이다. 「모든 이치를 갖추었다」는 말은 仁, 義, 禮, 智의 범주로 통괄되는 인간 행위의 一切의 道理가 天賦로서 마음에 이미 內在해 있다는 뜻이다. 「온갖 일에 應해 간다」는 것은 外部의 事物을 接할 때에 內部의 理 (이 理를 「性」이라고 했음)가 實現되어 감을 말한다. 「모든 이치를 갖춘 것」이 明德의 本體이고, 「온갖 일에 應해 가는 것」이 明德의 運用이다. 그러니까 明德 곧 人性은 단순한 理象界의 사실이 아니라, 本體論的인 근거를 가진 것으로 倫理道德의 법칙 따위를 날때부터 갖추고 있으면, 靈明한 모습이 그 본연의 상태라는 것이다.

다음 王陽明은 《大學問》에서 明德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大人은 天地萬物로써 一體를 삼는 者라서 天下를 한 집같이 보며 中國을 한 사람같이 보나니 저 形骸로 사이하고 너, 나를 나누는 者는 小人이다. 大人이 能히 天地萬物로써 一體를 삼는 것은 그렇게 하려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仁이 원래 이렇듯이 천지만물과 더불어 하나가 되니, 어찌 大人만이 이러하겠는가. 小人일지라도 마음은 그러하지 아니함이 없는데, 제 스스로 적게 만들었을 뿐이다.

이러므로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고 반드시 惻隱한 마음이 드는 것도 이는 그 仁이 어린아이와 더불어 一體가 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는 같은 인간이므로 그렇다고 하자. 鳥獸가 슬피 울고 벌벌거리는 것을 보아도 반드시 不忍한 마음이 드는데 이는 그 仁이 鳥獸와 더불어 一體가 되기 때문이다. 鳥獸는 知覺이 있기 때문이라 하자. 草木이 꺾어지는 것을 보아도 반드시 애틋한 마음이 드는데 이것도 그 仁이 草木과 더불어 一體가 되기 때문이다. 草木은 차라리 生意가 있기 때문이라 하자. 瓦石의 毁壞를 보고도 애틋한 마음이 드는데 이것도 그 仁이 瓦石과 더불어 一體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一體의 仁은 비록 小人의 마음일지라도 반드시 있으니 이것은 실로 天命의 性으로 좇아 우러나 자연히 靈昭不昧한 것이다. 그래서 明德이라 한다」

王陽明은 이와 같이 明德을 天地萬物과 一體가 되는 길로서의 「커다란 仁」으로 풀이했다.

明德의 해석에 대한 학자들의 見解는 위와 같이 차이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근본적인 대립이 아니라 같은 바탕 위에서 보여 주는 작은 차이일 뿐으로 明德은 사람에게 天賦的으로 주어져 있다는, 그리고 밝은 것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 그 本然의 모습이라는 데 근본적으로 一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태어난 뒤에는 그 氣稟 (生理的, 體質적 要素) 關係, 살아가는 동안의 習俗, 物慾등 후천적 영향으로 因하여 본래의 明德은 흐려지고 만다. 明德이 흐려지면 惡이 行하여질 가능성이 생긴다. 흐려진 明德을 밝게 하여 제 본색을 드러내게 하는 것이 바로 明明德인 것이다. 인간은 자기 본성 속에 生의 眞理를 가지고 있다. 이 진리는 인간의 無自覺한 蹈襲的, 惰性的 생활 속에서 그 빛을 잃어 버리기 쉽다.

하늘로부터 얻어 온 虛靈不昧한 것이 明德이라고 본 朱憙는 그의 《大學或問》에서 明明德에 대하여 말하기를 「다만 氣稟에 拘碍되고 人欲에 가리워지면 때로 昏昧해진다. 하나 그 本體의 밝음은 息滅되지 않는 것이므로 배우는 者는 반드시 그것이 發하는 바에 근거하여 밝히어 가 그 原初의 상태에 回復해야 할 것」이라 했다. 그러니까 氣稟과 人欲등은 明德을 昏昧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없애 나가는 것이 明明德이라는 말이다.

明德을 거울에 比喩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거울에 먼지가 끼면 본래의 밝음이 가리우고 어두워진다. 그러나 본래의 밝음이 아주 상실된 것이 아니므로 조금 이라도 빛이 發하는 데를 根據하여 닦아 나가며는 이내 본래의 밝음이 드러나게 된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빛이 發하는 데」 곧 앞에서 引用한 朱憙의 「그것이 發하는 바」라는 것은 사람이 外界의 事象에 接했을 때 나타나는 明德의 反應을 일컫는다. 그 반응의 대표적인 端緖가 「四端」, 즉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 등이다.

明德은 한마디로 말해서 理性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른바 칸트의 實踐理性의 성격이 강한 것이다. 유교 철학은 인간의 理性위에 수립된 것으로 이성을 인간 본연의 모습이라 보고 氣質과 人欲의 가림을 헤쳐내고 그 본연으로 돌아가 그것을 體認, 최대한 實現하는 것으로 인간 완성을 期하고 있다. 이렇게 밝은 본연의 自我로 回歸함으로써 인간 완성에의 길로 精進하는 것이 바로 明明德인 것이다.

(more to come)

弟二節

原文

知止而后에 有定이요 定而后에 能靜이요 靜而后에 能安이요 安而后에 能慮요 慮而后에 能得이니라

韓譯 ***

英譯, 弟一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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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譯, 弟二次 ***

解設

(more coming soon)

資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