杜稿鍾隸 漆書壁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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杜稾[注 1]鍾隸[注 2]요 漆書壁經[注 3]이라 (杜◯稾鍾隸◑요 漆●書壁●經◎이라)

()杜操의 草書와 鍾繇의 隸書이고, 옻칠 액 글씨의 벽 속 經書이다.

蒼頡[注 4]造書러니 三代互有損益하며 秦隸人[注 5]程邈은 作隸書하고 東漢杜操[注 6]는 作草書하고 魏鍾繇는 作小隸하니 今楷字也라
漢魯恭王[注 7]이 修孔子廟라가 壞古牆壁하여 得尙書하니 以古篆으로 畫漆書於竹簡者也라 得於孔壁이라 故曰壁經이라

蒼頡이 글자를 만들었는데, 三代(夏ㆍ殷ㆍ周)에 서로 증감이 있었으며, 秦나라의 隸人 程邈은 隸書를 만들고 東漢의 杜操는 草書를 만들고 魏나라의 鍾繇는 小隸를 만들었으니, 小隸가 바로 지금의 楷字이다.
前漢 때 魯恭王이 孔子의 사당을 수리하다가 옛 벽을 헐어 ≪尙書≫를 얻었는데, 옛 篆字로 옻칠 액 글씨로 대나무 쪽[竹簡]에 그어 쓴 것이다. 공자 집의 벽 속에서 얻었으므로 壁經이라 하였다.

[節旨] 이 節은 윗글의 墳ㆍ典을 이어 말하여 서적이 많음을 보였다.(≪釋義≫)

杜稿鍾隸

杜稿鍾隸

(韓) 초서를 처음으로 쓴 두고와 예서를 쓴 종례의 글로 비치되었다.

(簡) 쇠북과 글씨가 노적같이 쌓여 있고

초서를 처음으로 쓴 종례의 글로 비치되었다. 막을 두(杜),마를 고(槁),술잔 종(種),예서 례(隷) 두고(杜槁)는 姓과 草稿을 말 함이요,杜는 後漢의 杜度를 칭하며 字는 白度로 艸書에 能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杜槁라 함은 杜白度가 쓴 초서를 말하는 것이다.

한자 유래

두고종예(杜槀鍾隸)에서 두도(杜度)의 초서(草書) 초고(草稿), 종요(鍾繇)의 예서(隸書)라는 말이다. 두고(杜槀)는 두도(杜度)의 장초체(章草體)의 초고(草槀.草稿)를 말한다. 그런데 초고(草稿)라고 할 때, 여기에서 초(草)의 의미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일정하게 고정된 글자의 자체(字體)를 말하며, 또 하나는 '초략(草略)한 사법(寫法)'이란 의미로 시문의 초벌 원고(原稿)를 말한다. 따라서 초서(草書)로 쓴 문고(文槀)를 말한다. 종(鍾)은 이 천자문을 지은 대문장가 종요(鍾繇)를 말한다.


막을 두(杜)자는 형부인 나무(木)와 성부인 ‘흙 토(土)’자가 ‘두’로 전음 된 형성자(形成字)이다. 그러니 두(杜)자는 나무(木)가 흙(土)처럼 여기저기 널린 '팥배나무(杜)'를 뜻한다. 성부인 토(土)자는 ‘팥배나무 두(杜)’자의 본의(本意)를 담고 있다. 토(土)자는 땅 위에 쌓인 흙덩이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흙(土)’이라는 뜻의 3획 글자이다. 그러니 땅에 여기저기 쌓여 가로막듯이 널리 널려있어서 가로막는 나무를 나타내는 두(杜)자는 나무(木)가 흙(土)처럼 여기저기 널린 팥배나무(杜)를 뜻한다. 나무(木)가 흙(土)처럼 여기저기 널린 팥배나무(杜)는 팥과 같은 열매가 배처럼 열린다 하여 당리(棠梨)라 일컬으며 서구(西歐)라 부른다. 이런 배경(背景)을 보더라도 팥배나무가 너무 많아 걸치적거리게 되는 연유에서 두(杜)자는 ‘막다, 닫다, 닫아걸다’라는 뜻으로 확장(擴張)되었음을 짐작(>斟酌)할 수 있다. 그런데 나무(木)가 흙(土)처럼 여기저기 널린 팥배나무(杜) 열매는 접동새라 이르는 두견(杜鵑)이가 즐겨먹는 열매였다. 그리고 나라가 망한 한을 품고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두견새가 피를 흘린 곳에서 붉게 피어난다는 설이 있는 두견화(杜鵑花, 진달래꽃)도 집도 짓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두견새의 신새처럼 여기저기 널려서 피는 것이다. 나라가 망하기 전에 어떤 작은(微) 일을 막아(防) 커지는 것을 미리(漸) 막는(杜) 방미두점(防微杜漸)으로 임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일이 터지고 나서 문(門)을 닫고(杜) 나아가지(出) 않는(不) 두문불출(杜門不出)한다. 외부와 연락을 두절(杜絶)하고 지난 세월을 한탄하며 두견주(杜鵑酒)에 취해 꺼이꺼이 피토해 울면 이미 소용(所用)이 없다.


짚 고, 마를 고(藁)의 구성(構成)은 뜻을 나타내는 풀 초(艹 艸, 초두머리) 부(部)와 음(音) 나타내는 마를 고(槁, 槀)가 합(合)하여 이루어진 형성자(形聲字)이다. 즉, 고(槀)는 고(槁)의 본자(本字)로 나무 목(木)과 높을 고(高)의 형성자(形聲字)이다. '고(高)'는 '확(確)'과 통하여, '굳다'의 뜻이다. 여기에 목(木)이 붙어서 '나무가 굳어지다, 말라죽다'의 고(槀)를 화(禾)와 고(高)의 형성자로 보아, 본뜻은 '볏짚'으로 '초고(草稿) 원고(原稿)'를 뜻한다. 고(槀)는 고(稿), 고(藁)로도 쓴다.


종 종(鐘)은 미리 만든 거푸집에 쇳물을 부어 주물(鑄物) 하는 모양(模樣)을 본뜬 쇠 금(金)과 아이 동(童)으로 이루어졌다. 동(童)자의 갑골문(甲骨文)을 살펴보면, 현재의 자형과는 아주 다르다. 자형상부의 ‘입(立)’은 본래는 노비나 죄인(罪人)에게 이마나 팔뚝에 먹물 문신을 뜨는 꼬챙이를 상형한 ‘매울 신(辛)’의 간략형이다. 신(辛)은 본래 ‘죄’를 뜻하였으나 묵형(墨刑)을 당할 때의 고초가 몹시도 매서웠기 때문에 ‘맵다’와 ‘살상’의 뜻으로까지 확대(擴大) 되었다. 동(童)의 자형하부는 겁에 질려 눈을 크게 뜬 사람의 모습(模襲)이 그려져 있다. 노예(奴隸)나 죄인임을 표시하기 위해 꼬챙이로 문신을 뜬 대상이 곧 童(동)자의 본래 모양이다. 이는 갑골문(甲骨文)과 금문, 그리고 대대적으로 간자화(簡字化)가 이루어진 진시황의 문자통일의 유물인 소전을 거치면서도 여전히 童(동)자는 초기 글자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서였는지 한(漢)나라의 문자학자 허신(許愼)도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 동(童)을 “남자가 죄를 지으면 노예가 되는데 이를 동(童)이라 부르고, 여자인 경우에는 첩(妾)이라고 불렀다”고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후대(後代)로 오면서 ‘어린아이’라는 의미(意味)로 가차(假借)되어 널리 쓰이자 본뜻을 보존(保存)하기 위해 손 수(扌)를 더해 노예를 ‘때리거나 치다’의 뜻을 지닌 ‘칠 당(撞)’을 별도(別途)로 만들었다. 따라서 鐘(종)의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때리거나 치면(童) 소리가 나는 쇠(金)라는 데서 ‘종’ ‘쇠북’이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종(鐘)의 쇠북은 종(鐘)의 옛말이다. 종(鐘)과 같은 뜻의 글자인 쇠북 종(鍾)자는 '무거운(重) 쇠(金)로 만든 것이 쇠북이다'는 뜻이다. 서울 종로(鍾路)는 '종(鍾)이 있는 길(路)'이고, 종로에 있는 종각(鐘閣)은 '종(鐘)이 있는 누각(閣)'이다. 종각의 종(鐘)은 조선 시대에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 역할을 하였다.

종 예(隷)의 구성(構成) 뜻을 나타내는 미칠 이(隶) 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선비 사(士)와 보일 시(示)로 이루어진 회의자(會意字)다. 기본의미는 관리(士)의 의중(意中)을 잘 알아서(隶)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또한 '이(隶)'는 '붙잡다'의 뜻이고, '내(柰)'는 고문(古文)에서는 수(祟)인데 그 뜻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죄인이나 이민족을 붙잡아서 '종으로 삼다, 복종(服從)시키다'의 뜻을 나타낸다. "설문(說文)"에서 예(隸)는 부착(附着)하는것이라 했으니 노예를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서체(書體)의 하나인 예서(隸書)를 말한다. '예서(隸書)'란 십체서의 하나이다. 전서(篆書)보다 간략하고 해서(楷書)에 가까운 글씨체로, 진나라 운양의 옥사(獄事) 정막(程邈)이 번잡한 전서를 생략하여 만든 것인데, 노예와 같이 천한 일을 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도록 한 글씨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한(漢)대에 다시 고쳐 팔분(八分)이라 했으며, 송(宋)대 구양수(歐陽脩)의 "집고록(集古錄)"에서 처음으로 예서라 일컬었다. 또한 진서(眞書)라고도 한다.

漆書壁經

漆書壁經

(韓) 하나라 영제가 돌벽에서 발견한 서골과 공자가 발견한 육경도 비치되어 있다.

(簡) 벽에 걸린 경서는 옻칠이 되어 있고

한나라 영제(사람을 칭함)라는 이가 돌 벽에서 발견한 서골과 공자가 발견한 육경도 비치 되어있다. 옷 칠(漆), 글 서(書), 바람 벽(壁), 글 경(經) 學習考:鍾隸 란 鍾酒器也라 하여 술병을 말하고, 隸는 奴隸라는 뜻이다. 그러나 본문의 鍾은 魏나라의 "종 요" (鍾繇)를 가리키는데, 字는 원상(元常)이요 이름 높은 명필이었다.여기에 따르면 鍾繇의 隸書를 말함이다. 예서라 함은 먹과 붓이 없었던 옛날에 대나무쪽에 옻으로 칠하여 쓴 글이다.벽경(壁經) 하면 壁은 담이라 했고, 경(經)無小不通하는 聖人의 저술을 말한다. 壁經은 魯나라 恭王時代에 孔子의 舊屋을 破壞했을 때 벽(壁)속에서 나온 고문상서(古文尙書).논어(論語).효경(孝經)등의 과두문자(과두文字)로 기록된 經書를 말한다.

한자 유래

칠서벽경(漆書壁經)이란 고전자(古篆字)를 옻으로 쓴 벽경(壁經)을 뜻한다. 즉, 칠서(漆書)란 대나무를 쪼개 만든 죽간(竹簡)에다 옻나무의 진액[漆液]을 채취해 빨대모양의 갈대를 잘라 그 끝에 이 칠액을 뭍혀 글씨를 썼는데 이것이 칠서(漆書)다. 벽경(壁經)이란 벽(壁)에서 나온 경서(經書)라는 뜻한다.

옻 칠(漆)의 구성(構成)은 물줄기가 갈라지고 합해지는 강을 본뜬 水(수)를 간략히 세 개의 물방울로 표시한 수(氵)와 옻 칠(桼)로 이루어졌다. 칠(桼)에 대해 "설문(說文)"에서는 “칠(桼)은 나무의 즙으로 물건(物件)을 검게 칠할 수 있다. 목(木)으로 구성(構成)되었으며 나무의 즙이 마치 물방울처럼 아래로 떨어지는 모양(模樣)을 본떴다.”고 하였다. 즉 옻나무(木)에 홈(∨)을 파두면 진액(氺)이 떨어지는 모양(模樣)을 본뜬 것이다. 이는 나무를 베지 않고 살려둔 채 옻을 채취(采取)하는 방법이며, 칠(柒)은 옻나무(木)의 가지를 베어(七)내어 진액(氵)을 채취하는 방식이(方式)다. 칠(桼)이 본디 옻칠을 뜻하였으나 여기에 물 수(氵)를 더해 옻 칠(漆)의 의미(意味)를 확실(確實)하게 하였다.

글 서(書)의 구성(構成)은 붓 율(聿)과 가로 왈(曰)로 짜여 있다. 율(聿)은 붓 대(丨)를 손으로 잡고(彐)있는 모양(模樣)과 함께 동물(動物)의 가는 털을 모아 만든 붓(二)의 형태(形態)를 그대로 본떠 만든 상형글자(象形字)다. 왈(曰)은 입의 모양(模樣)을 본뜬 구(口)와 입에서 나오는 말을 추상적(抽象的)으로 표현(表現)한 것이 바로 일(一)의 형태(形態)다. 그래서 ‘가로되’ ‘말하다’ ‘이르다’ 등의 뜻을 나타낸 지사글자(指事字)다. 따라서 서(書)의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성인(聖人)과 같은 훌륭한 사람이 말씀(曰)하신 것을 붓(聿)으로 기록한다는 의미(意味)가 담겨 있다. 이렇듯 훌륭한 책을 경전(經典)이라 하여 받들어 왔다는 데서 ‘글’ ‘책’이란 뜻을 지니게 되었다.

벽 벽(壁)의 구성(構成)은 임금 벽(辟, 피할 피)과 흙덩이를 쌓은 모양(模樣)을 상형한 흙 토(土)로 이루어졌다. 벽(辟)에 대해 "설문(說文)"에서는 “벽(辟)은 법(法)을 뜻한다. 절(卪)과 신(辛)으로 구성(構成)되었으며 그 죄를 절도 있게 다스림을 말한다. 또한 구(口)로 구성(構成)되었음은 곧 입으로 법(法)을 말한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갑골문(甲骨文)의 자형을 보면, 꿇어앉은 죄인(尸)을 날카로운 도구(辛)로 고문하며 죄를 추궁(追窮)하는 모양이다. 여기에 말로써 조사(調査)한다는 의미의 구(口)는 금문에 이르러 더해진 것이다. 이러한 죄인들의 추궁과 고문은(辟) 대부분 돌이나 흙(土)으로 쌓아올린 공간(空間)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벽(壁)’이란 뜻을 지니게 되었다.

날 경(經)의 구성(構成)은 가는 실 사(糸)와 물줄기 경(巠)으로 짜여 있다. 사(糸)는 가는 실을 감은 실타래를 본뜬 것이며, 경(巠)은 땅속(一)의 빈 공간(工)으로 흐르는 물줄기(巛)를 말한다. 따라서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세로로 맨 날줄(糸)과 같이 땅 속 물길의 흐름(巠)을 나타내는 줄기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래서 성인(聖人)의 날줄과 같은 말씀이 담겼다 하여 ‘경(經)이라고도 하고, 삶의 지침(指針)으로서의 도리(道理)라는 의미(意味)를 지니게 되었다.

  1. 稾 : 俗字가 藁이고, 稿와 同字이다.(≪註解≫)
  2. 隸 : 本字가 隸이다.(≪註解≫) 예서는 곧 지금의 眞書(해서)이다. ≪書苑≫에 이르기를 “程邈의 예서를 분할하여 二分(20%)을 채택하고 李斯의 小篆을 분할하여 八分(80%)을 채택하여 八分書가 되었다.” 하였으니, 지금 예서라고 일컫는 것은 팔분서이고, 옛날에 예서라고 일컫던 것은 바로 眞書이다. 또 ≪唐六典≫에는 “校書郎과 正字가 쓰는 서체는 5가지가 있는데 네 번째가 팔분서로 石經의 碑碣에 쓰는 것이고, 다섯 번째가 예서로 典籍과 表奏의 公用ㆍ私用의 상소문에 쓰는 것이다.” 하였으니, 예서가 真書인 것은 의심이 없다.(≪釋義≫)
  3. 杜稾鍾隸 漆書壁經 : 杜는 杜度(杜操)이고, 鍾은 鍾繇이다. 稾는 草稿이니, 무릇 글을 지을 적에 초고는 대부분 초서를 사용하므로 초서를 稾라고 한다. 漢 章帝 때에 두도가 초서를 잘 썼다. 隸는 미천한 사람의 칭호이다. 진시황 때에 程邈이 처음으로 古文 篆書를 바꾸어 隸書를 만들었는데 간단하고 빨라서 노역하는 노예들에게 편리하였으므로 예서라고 불렀다. 魏나라 鍾繇가 이 글씨를 잘 썼다. 漆은 나무 액체로서 기물을 치장할 수 있는 것이다. 옛날 사람은 먹이 없어서 옻칠 액으로 대나무 쪽 위에 글자를 썼다. 書는 載籍(書籍)의 통칭이다. 壁은 담장이다. 經은 6經이니, ≪易經≫ㆍ≪書經≫ㆍ≪詩經≫ㆍ≪禮經≫․≪樂經≫ㆍ≪春秋經≫이다. 여기서 이른바 經은 바로 ≪書經≫이다. 진시황이 책을 불태울 때에 공자의 8세손 孔騰이 ≪書經≫을 벽 속에 보관하였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魯恭王 劉餘가 공자의 옛 집을 헐다가 이것을 얻었는데 ≪古文尙書≫라고 불렀다. 이 節은 서적이 많아 초서도 있고 예서도 있고 칠서도 있으며 벽 속의 고문과 같은 것도 있는데, 전서로서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釋義≫)
  4. 倉頡 : 蒼頡로도 쓴다. 전설 속의 고대 인물이다. 黃帝의 史官으로서 처음으로 漢字를 만들었다고 한다.(≪人≫)
  5. 隸人 : 직위가 낮고 천한 관리를 가리킨다.(≪漢≫)
  6. 杜操 : 東漢 사람으로, 字가 伯度이다. 魏ㆍ晉시대에는 曹操의 이름을 피하여 杜度로 바꾸어 불렀다. 章帝 때에 齊相이 되었고 章草*를 잘 썼다.(≪人≫)
    • 章草 : 草書의 일종이다. 필획에 예서의 波磔(오른쪽 捺筆)이 있고 글자마다 독립되어서 연이어 쓰지 않는다.(≪漢≫)
  7. 魯恭王 : 劉餘이다. 출생은 미상이고, 武帝 元朔 원년(B.C.128)에 죽었다. 景帝의 다섯째 아들이다. 景帝 전2년(B.C.155)에 淮陽王에 봉해지고 뒤에 魯王으로 옮겼다. 궁실을 수리하기 좋아하였는데, 공자의 옛 집을 헐어서 그 집을 넓히다가 벽 속에서 古文 經傳을 얻었다. 죽자 시호를 恭이라고 하였다.(≪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