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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召公奭<ref group="注">召公奭 : 周나라 文王의 庶子, 이름은 奭이다. 成王 때에 三公이 되어 陝(섬) 以西의 땅을 다스렸다. 일찍이 南方을 巡行하다가 감당나무 아래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가 떠나간 뒤에 그의 덕을 추모하고 그 나무를 아껴 노래를 지은 것이 ≪詩經≫ 〈甘棠〉이다. 召를 食邑으로 받고 諸侯의 우두머리로서 方伯이 되었기 때문에 召伯이라고 하였다.
周召公奭<ref group="注">召公奭 : 周나라 文王의 庶子, 이름은 奭이다. 成王 때에 三公이 되어 陝(섬) 以西의 땅을 다스렸다. 일찍이 南方을 巡行하다가 감당나무 아래에 머문 적이 있었는데, 그가 떠나간 뒤에 그의 덕을 추모하고 그 나무를 아껴 노래를 지은 것이 ≪詩經≫ 〈甘棠〉이다. 召를 食邑으로 받고 諸侯의 우두머리로서 方伯이 되었기 때문에 召伯이라고 하였다.
陝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으로, ≪春秋公羊傳≫ 隱公 5年에 “陝 동쪽은 周公이 관할하고, 陝 서쪽은 召公이 관할한다.” 하였다. 오늘날 河南省 陝縣 지역이고, 더 큰 지역으로 西安이 속한 陝西省도 이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ref>이 在南國之日에 止舍於甘棠之下하니 南國之人이 無不從其敎化焉하니라<br>
陝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곳으로, ≪春秋公羊傳≫ 隱公 5年에 “陝 동쪽은 周公이 관할하고, 陝 서쪽은 召公이 관할한다.” 하였다. 오늘날 河南省 陝縣 지역이고, 더 큰 지역으로 西安이 속한 陝西省도 이 지명에서 유래된 것이다.</ref>이 在南國之日에 止舍於甘棠之下하니 南國之人이 無不從其敎化焉하니라<br>
及其去也에 則民益思慕하여 作甘棠詩하여 曰 蔽芾<ref group="注">蔽芾 : 성대한 모양이다.(≪詩經≫ 〈甘棠〉 集傳)</ref>甘棠을 勿翦勿伐이어다 召伯所茇<ref group="注">茇 : 草家이다. 그 아래에 머물러 스스로 가려서 초가와 비슷할 뿐이니, 집을 지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詩經≫ 〈甘棠〉 大全)</ref>이라하니 可見其澤之入人이 深也라<br>
及其去也에 則民益思慕하여 作甘棠詩하여 曰 蔽芾<ref group="注">蔽芾 : 성대한 모양이다.(≪詩經≫ 〈甘棠〉 集傳)</ref>甘棠을 勿翦勿伐이어다 召伯所茇<ref group="注">茇 : 草家이다. 그 아래에 머물러 스스로 가려서 초가와 비슷할 뿐이니, 집을 지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詩經≫ 〈甘棠〉 大全)</ref>이라하니 可見其澤之入人이 深也라
 
周나라 召公 姬奭이 남쪽 諸侯國에 있을 때에 甘棠나무 아래에 머물렀더니, 남쪽 제후국의 사람들이 그 교화를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br>
周나라 召公 姬奭이 남쪽 諸侯國에 있을 때에 甘棠나무 아래에 머물렀더니, 남쪽 제후국의 사람들이 그 교화를 따르지 않는 이가 없었다.<br>
그가 떠나가고 나서, 백성들이 더욱 그를 사모하여 〈甘棠〉詩를 지어 “무성한 감당나무를 베지 말고 치지 말라. 召伯(召公)께서 草幕으로 삼으셨던 곳이다.” 하였으니, 그 恩澤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이 깊음을 알 수 있다.
그가 떠나가고 나서, 백성들이 더욱 그를 사모하여 〈甘棠〉詩를 지어 “무성한 감당나무를 베지 말고 치지 말라. 召伯(召公)께서 草幕으로 삼으셨던 곳이다.” 하였으니, 그 恩澤이 사람들에게 들어간 것이 깊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