尖齊圓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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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신문 기자 / 2020년 01월 12일

첨제원건(尖齊圓健)이란 붓이 갖춰야 할 네 가지 미덕(美德)을 말하는 것이다. 첫째 붓끝은 뾰족[尖]해야 한다. 붓끝이 가지런히 모아지지 않으면 버리는 붓이다. 둘째 마른 붓끝을 눌러 잡았을 때 터럭이 가지런해야 한다. 터럭 쪽이 고르지 않으면 끝이 갈라져 획이 제멋대로 나간다. 셋째 원윤(圓潤)이다. 즉 먹물을 풍부하게 머금어 획에 윤기를 더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넷째는 탄력성[健]이다. 붓은 가운데 허리 부분을 떠받치는 힘이 중요하다. 종이 위에 붓을 댔을 때 튀어 오르지 않고 퍼지지 않아야 한다. 탄성이 너무 강하면 획이 튀고 너무 없으면 붓을 일으켜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요소를 갖춘 붓을 만들려고 족제비 털 황모(黃毛)와 다람쥐 털 청모(靑毛) 노루 겨드랑이 털 장액(獐腋), 염소 털 양모(羊毛), 그밖에 뻣센 돼지 털과 서수필(鼠鬚筆) 같은 짐승의 털을 동원한다. 빳빳한 토끼털로 기둥을 세우고 청모나 황모로 안을 채우며 족제비 털로 옷을 입힌 붓을 최상으로 친다. 그뿐이 아니다. 털의 산지(産地)도 가렸고 채취(採取) 시기가 가을인지 봄인지도 따졌다. 어디 붓만 그렇겠는가?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을 가려 쓰는 이유이고 현인(賢人)을 찾고 인재(人才)를 찾는 이유이다. 과거(科擧)를 시행하고 인재를 등용할 때 적재적소(適材適所)를 따지는 이유이다.

물러 터져서 좋다는 소리만 들어서는 큰일을 못한다. 사람도 끝이 있어야 한다. 끝이 살아 있어야 마무리가 차지다. 행동에 일관성이 있고 행보를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 이리저리 튀면 뒷감당이 안 된다. 또 원만하고 품이 넓어야 한다. 공연히 팩팩거리기만 하고 머금어 감싸 앉는 도량(度量)이 없으면 아랫사람이 따르지 않는다. 뒷심이 있어 부하의 바람막이가 되어주고 상관의 부당한 압력에는 막아서는 결기도 있어야 한다. 눈치만 보다 제풀에 푹 쳐져서는 큰일을 도모(圖謀)할 수 없다. 물론 붓만 좋다고 글씨가 덩달아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도구를 잘 갖추고 바른 자세로 피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부단학회(不斷學誨)란 말이 생각난다. 논어 술이(述而)편에 나오는 공자의 말씀이다. 배움을 싫어하지 않고 사람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子曰.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 여기에 나오는 識자를 ‘알다’는 뜻으로 풀이하기도 하지만 주희는 ‘기억하다’로 풀이하는 것이 더 옳다고 했다. 공자는 누구보다도 배움에 열심이었던 성인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인격수양도 소홀히 하지 않았고 고전학습도 크게 중시해 평생을 끝없이 공부했다. 공자 같은 성인도 그러할진데 우리 같은 서민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끝없이 배우고 노력해야 한다.

심리학에 귀인편향(歸因偏向)이란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된 행동이나 태도는 그 사람의 기질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잘못은 사회규범이나 주변 상황 때문으로 생각하는 성향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전 중에 다른 차가 갑자기 끼어들면 교양 없는 난폭한 운전자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자신이 갑자기 차선을 바꿀 때는 차량 흐름이나 다른 불가피한 이유로 어쩔 수 없는 상황일 뿐 이라고 변명한다. 바로 내로남불이고 귀인편향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남을 탓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진지하게 돌아봐야 한다.

성호사서(城狐社鼠)라는 고사에 나오는 여우와 쥐새끼를 잘 살펴야 한다. 귀인편향은 물론 간신(奸臣)과 모리배(牟利輩)를 잘 살펴야 한다. 동물에 비유하면 꾀로는 여우[狐]이고 비루함으로는 쥐[鼠]다. 성벽에 숨어사는 여우와 사직단에 파고들어간 쥐새끼를 잘 살피라는 말이다. 최고 권력의 비호를 받으며 안전한 곳에 몸을 숨기고서 백성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해대는 간신과 모리배를 잘 살피라는 말이다. 시국을 보면서 첨제원건을 떠올리는 이유이다.

이규임 / 한국영상제작학회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