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자학 망국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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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주자학 때문에 망했을까?

'주자학'이라는 단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루함', '공리공담', '망국' 등 부정적인 수사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의 뇌리 속에 어렴풋이 그러나 깊숙이 박혀있는 주자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과거 일제 식민지지배의 쓰라린 경험과 닿아있다.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자신들의 조선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한국사를 왜곡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의 당쟁을 부각시켜 당파에 의한 분열이 한국민족의 민족성이라고 강변하고, 이를 한민족에게 주입하는데 주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당쟁의 이데올로기인 주자학도 함께 매도되었다. 여기에 암울한 식민지 치하에서 한국의 지식인들이 국권상실에 대한 반성의 차원에서 행한 성리학과 당쟁에 대한 비판이 중첩되었다. 우리가 '주자학망국론'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인 양 받아들이게 된은 이러한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하지만 식민사학의 극복이 우리 역사를 미화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없듯이 조선사회의 발전에 있어서 성리학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 측면도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주자학에 대하여 성급하게 긍정.부정의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이를 중세사회의 역사적 산물로서 이해하고 그 기능과 그 본질에 대해 차분히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성리학의 수용과 사회적 기능

성리학은 중국 송대의 사대부층에 의하여 성립된 유학사상체계이다. 성리학은 대표적 학자와 경향에 따라서도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 육왕학(陸王學), 양명학(陽明學), 이학(理學), 도학(道學), 심학(心學), 신유학 등 다양하게 불렸다. 우리나라에서는 역사적으로 정주계의 이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특히 근대사회와 맞닿은 조선후기에는 정주계의 이학 가운데서도 주자학이 지배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우리사회에서 성리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주자학을 가리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자학은 고려말의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향촌에서 중소지주층으로 새로이 성장한 이른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처음 수용되었다. 이들은 국가권력을 잡고 토지겸병을 일삼는 권문세족에 대항하여 재지(在地)지주의 기반을 유지·확대하고 나아가 중앙정계로 진출하여 조선의 건국과정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훈구파가 정계를 주도하면서 학문·사상계의 동향은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이념을 정립하는데 힘쓰기보다는 시문 중심의 사장학(詞章學)과 이미 확립된 예제(禮制)나 법제의 준수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다른 한편 이 시기에 이르러 향촌에 생활근거를 두면서 성리학을 추구하고 있던 사림파(士林派)가 대두하였다. 이들은 재지사족의 입장에서 성리학을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배층 전반이 도덕적 실천을 통해 당면한 사회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15세기 전반부터 다시 시작된 토지겸병은 16세기 중엽에는 크게 확대되어 많은 농민이 토지를 상실하였고 양인에서 노비로 전락하는 사람도 늘어만 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었지만 지배층의 부도덕한 대민수탈이 가장 큰 문제로 작용하고 있었다. 세조때 이래 공신세력 및 조상 대대로 벼슬을 해온 가문 출신인 훈구파는 특권을 이용하여 부를 더욱 확대해가고 있었다. 이들과는 달리 사림파의 모집단인 지방사족은 그 직접적인 피해자는 아닐지라도 휘하 농민의 파산과 향촌사회의 불안으로부터 무시못할 정도의 간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 속에서 15세기 후반부터 사림파의 중앙정계진출이 활발해졌다. 이들은 당시 사회모순과 훈구파(勳舊派)의 비리를 비판하는 한편 정치 및 사회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훈구파의 부도덕한 정치로 일반농민은 물론 향촌내의 중소지주층의 입지도 흔들린다고 보고 성리학에 바탕을 둔 왕도정치를 주창하였으며 삼강오륜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을 정치의 기본내용으로 삼았다. 사림파는 향약보급운동 등을 통하여 향촌사회에 자치적 기능을 부여하고 유교적 도덕윤리를 함양함으로써 지배층의 비리를 배제하는 방향으로 사회개혁을 꾀하였다. 향촌사회의 구성원인 지주와 전호 사이의 관계를 신분제적 질서 아래 규정하고 구성원간의 도덕적 화합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사회윤리는 사족지주들의 이해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사림파는 중앙정치의 파행성과 향촌사회의 불안정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 및 사회개혁을 추진한 세력이었다. 16세기에 발달한 성리학은 사림파의 개혁추진에 이론적 근거로 기능함으로써 당시 조선사회의 발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던 것이다.

성리학 이해의 심화

16세기를 거치면서 조선사회는 주자학의 단순한 수용단계를 넘어서게 되었다. 오랜 시일에 걸쳐 이황(李滉)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전개된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은 조선에 수용된 성리학이 그 학문적 깊이를 더욱 심화시켜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었던 하나의 징표라 해도 좋았다. 이 시기 도덕과 실천을 강조하는 조선 성리학의 기풍은 예학의 발달로 이어졌으며 사우(師友) 관계를 중요시하는 흐름과 연결되어 이황, 조식(曺植), 이이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학파 또한 형성되어 갔다. 이 시기는 조선 성리학의 황금기였다.

하지만 17세기 이후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당파가 서로 다른 학문적 사상적 논리로 무장하여 치열한 정권다툼을 벌이면서 주자학은 점차 그 사상적 탄력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특히 서인(西人) 계열과 남인(南人) 계열간에 벌어졌던 예송(禮訟)논쟁은 단순한 의례논란에서 벗어나 권력투쟁의 성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예송은 서로 다른 학문적· 이념적 지향을 가진 정파간의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나타났으며 예송에서의 패배는 곧 실각을 의미했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비주자학적인 해석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리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조선성리학은 주자학 일변도의 교조적 색채가 드리워졌고 다른 사상의 여지를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풍토가 조성되어갔다.

도덕의 실천성 강조에서 비롯된 예학이 예송을 거치면서 그 학문적 의미가 크게 퇴색하였으나 이후에도 사상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하지만 예학은 차츰 정치적인 의미도 상실하여 지배체제와 신분을 유지하는 보수적인 기능만이 남게 되었다. 예송에서의 치열한 학문적 대결은 자기 학파의 학문적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노력과 더불어 학파 내부에서의 의견대립을 양산하였다. 이러한 양상은 18세기에 들어와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18세기 이후 조선성리학계는 호락논쟁(湖洛論爭)의 전개, 정통론과 명분론의 강화, 그리고 성리학적 가치관을 사회에 확산시키려는 꾸준한 노력 등이 그 특징으로 지적된다. 특히 한원진(韓元震)과 이간(李柬) 사이에서 시작된 호락논쟁은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 성리학계의 최고의 이론적 관심사였다. 이 논쟁의 요점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은가 다른가에 대한 것이었다. 이 논쟁을 통하여 조선의 성리학은 그 이론적 탐구의 절정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사변적(思辨的)경향을 강하게 띠고 있는 이 논쟁은 성리학에 기반한 중세적 인간상이 형태를 달리하여 강조되고 있을 뿐, 근대적 세계관이나 평등한 인간관에 대한 이해와는 거리가 멀었다.

주자학의 교조화

18세기 성리학에서는 호락논쟁 외에 정통론과 명분론의 강화와 성리학적 가치관을 사회에 확산시키려는 꾸준한 노력들이 두르러진다. 이와 아울러 주자학은 사상계에서 독점적 지위를 굳히게 된다. 주자의 사상이 아닌 여타의 사상에 대해서는‘이단’,‘사학(邪學)’의 이름으로 배척하고 탄압한 것이다. 당초 사림파의 정치적·사회적 개혁의 이념적 지주였던 성리학은 이제 그 긍정적 기능을 점차 상실해 갔다.

주자학의 운명은 사실 사회변화 속에서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8세기 이후 농업 및 상공업의 발전, 상품화폐경제의 확산 등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변동은 종전과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었다. 이제 사회는 성리학과는 다른, 한 차원 발전된 사상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정치 및 사상의 주도층은 대부분 이를 외면하였다. 노론의 정치 주도가 한 세기 넘게 지속되었고, 19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서울 및 경기지역에 거주하는 몇몇 유력가문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세도정치가 전개되었다. 이들은 권력과 함께 서울로 집중되는 국가의 부를 향유하면서 자신들의 권력 및 권위유지에 급급하였다. 이제 주자학은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념이라기 보다 적대적인 또는 위협이 될만한 사상을 탄압·제거하는 무기로 활용되었다.

물론 18세기 이후의 사상계의 흐름이 주자학 일변도만은 아니었다. 정권에서 소외된 몇몇 소론(少論) 가문을 중심으로 양명학이 연구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역할은 미미한 것이었다. 이보다는 당시 사회개혁사상으로 널리 알려진 실학(實學)을 들 수 있다. 실학자들은 대체로 성리학에 학문적 연원을 두고 있으면서도 성리학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그들은 역사적 모순을 직시하고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개혁안의 이론적 바탕을 유학 본연의 정신에서 찾고자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일부는 근대적 사상체계에 근접하는 성과를 내기도 하였다. 실학사상은 유학이라는 뿌리를 같이했기 때문에 주자학과 공존할 수 있었으나 현실 정치 속에서 그 개혁정신을 관철할 가망은 없었다.

19세기로 접어들어서도 사상계는 별다른 진척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집권층의 일부가 고증학을 연구하거나 심성론 연구를 진행하였을 뿐 대부분은 맹목적으로 주자학에 매달리고 있었다. 이들은 사회모순의 해결에는 극히 소극적이었고 기존 지배체제를 유지하거나 자기만족에 그치는 지식 쌓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회모순을 해결할 사상이나 의욕을 지니지 못한 사람들만이 정권의 핵심에 남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새로운 사상을 가혹하게 탄압하거나 체제유지에 장애가 되지 않을 정도로 통제하고 있었다. 지배층은 천주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감결(鑑訣) 등도 이단으로 간주하여 배척하였다.

19세기는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1862년 삼남을 중심으로 폭발한 농민항쟁 등 '민란(民亂)'의 시대였다. 이는 조선후기의 각종 사회경제적 변화를 수용, 능동적인 대응책을 취하지 못하고 수구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던 위정자의 사상적 경직성이 당시 총체적인 사회모순과 맞물려 벌어진 상황이었다. 주자학 넓게 보아서 성리학은 이러한 시기에 사변적 철학적 논구에만 매달려 자기보위적 논리에 자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자학 자체는 중세적 사상이었다. 중세사회가 마감되고 근대사회로 옮겨가던 시점에서 주자학은 이미 그 임무를 마침과 함께 생명력도 다하였던 것이다. 주자학이 역사발전에 장애가 되었다고 해도 그 책임을 주자학 자체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 책임의 대부분은 당시의 역사적 현실을 직시하여 새로운 단계에 맞는 사상을 개발하고 수용하려 노력하기 보다는 낡은 사상에 매달려서 자기 이익의 도모 수단으로 사용한 사람들에게 지워져야할 것이다.

송양섭 作(고려대 강사)

출처: 原 출처 웹사이트는 검색으로 추척불가하였고 2024-03-27 날짜로 https://m.cafe.daum.net/koreanLHP/DQ/1244 를 통해 옮겨 오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