昆池碣石 鉅野洞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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昆池碣石과 鉅[注 1][注 2]洞庭[注 3]이라 (昆池碣●石●과 鉅◯野◯洞◑庭◎이라)

()못은 昆池, 산은 碣石, 늪은 鉅野, 호수는 洞庭이다.

昆池는 在雲南昆明縣하니 漢武欲通雲南[注 4]하여 鑿昆明池[注 5]하여 以習水戰하니 亦曰昆池라 碣石은 在北平郡黎城縣하니라
鉅野郡은 在泰山之東하고 洞庭湖는 在岳州大江之南과 彭蠡之西하니라

昆池는 雲南 昆明縣에 있다. 漢나라 武帝는 운남을 통행하려 하여 昆明池를 파고서 수상 전투를 익혔는데, 또한 곤지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碣石은 北平郡 黎城縣에 있다.
鉅野郡은 泰山의 동쪽에 있고 洞庭湖는 岳州의 大江(揚子江) 남쪽과 彭蠡의 서쪽에 있다.

昆池碣石

昆池碣石

(韓) 곤지는 운남 곤명현에 있고 갈석은 부평현에 있다.

(簡) 곤지에는 자갈만 남았고

곤지는 운남 곤지현에 있고 갈석은 부평현에 있다. 1.곤지와 3.竭石은 각각 2.昆池縣과 4.富平縣에 있다. 여기에서 昆池縣과 富平縣은 곤지에 昆池縣,竭石에 富平縣 과 같이 各各 운(韻)을 단것으로 2.와 4.순이다. 맏 곤(昆), 제(弟)와 대응하는 말,뒤 곤(昆).나중, 자손 곤(昆).후예(後裔), 같을 곤(昆).동일하다, 못 지(池).물이 괸 넓고 깊은 곳,해자 지(池).해자(垓字)는 성 밖으로 둘러서 판 못, 비석 갈(碣).네모진 것을 비(碑)라 하고 둥근 것을 갈(竭)이라 한다, 우뚝 솟을 갈.산이 우뚝 솟은 모양, 돌 석(石).암석.옥석(玉石)굳을 석(石).견고함.석교(石交;돌같이 굳은 우정), 돌 비석 석(石).석비(石碑),섬 석(石).용량의 단위로서 열말,

한자 유래

'곤지(昆池)'는 중국 대륙의 서남쪽 운남성(雲南省)에 있는 곤명지(昆明池)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곳은 중국의 고대 왕조가 천축국(天竺國)이라고 부른 인도(印度)로 가는 통로(通路)이자 중요한 무역로(貿易路)였다. '갈석(碣石)'은 하북성(河北省)에 있는 갈석산(碣石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갈석산은 중국 고대 제왕(諸王)들이 중국 대륙을 돌아보는 순행(巡行)에 자주 등장(登場)하는 곳이다. 진시황(秦始皇)은 신하들을 보내 이곳 갈석산 입구에 자신의 '위대한 공로(功勞)와 업적(業績)'을 기리는 비문(碑文)을 새기게 했다. 이렇게 보면, 갈석산은 고대 중국의 제왕들이 매우 중요(重要)시 여겼던 장소 중의 하나였다고 짐작(斟酌)해볼 수 있다.

맏 곤(昆)은 해 일(日)과 견줄 비(比)로 구성(構成)되었다. 일(日)은 태양의 모양(模樣)을 본뜬 상형글자다. 비(比)에 대해 허신은 "설문(說文)"에서 “비(比)는 친밀(親密)하다는 뜻이다. 두 개의 인(人)으로 구성되면 종(从)이 되고, 从이 반대로 되면 비(比)가 된다.”고 하였다. 갑골문(甲骨文)의 자형들을 살펴보면 같은 뜻의 글자라 하더라도 그 구성부수의 순서나 위치가 바뀌는 경우가 많은 점을 고려할 때, 종(从)이나 비(比)는 같은 의미(意味)를 지닌 글자로 보인다. 그러나 후대로 오면서 종(从)은 두 사람이 서로 따라간다는 뜻으로 정(定)해지면서 현재 쓰이는 종(從)의 옛글자로서 뿐만 아니라 요즘에는 이의 간체자(簡體字)로도 쓰이고 있다. 또한 비(比)는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서 앉아(匕) 모양으로 해석(解釋)된다. 그래서 곤(昆)은 햇빛(日)이 모든 사물(事物)을 나란히(比) 비춘다는 의미에서 ‘같다’는 뜻과 함께 ‘맏이’라는 뜻으로 확장(擴張)되었다.

못 지(池)의 구성(構成)은 물줄기가 갈라지고 합(合)해지는 강을 본뜬 水(수)를 간략히 세 개의 물방울로 표시(表示)한 물 수(氵)와 어조사 야(也)로 이루어졌다. 야(也)는 금문(金文)과 소전(小篆)에 나타난 모양(模樣)으로 볼 때, 여성(女性)의 생식기(生殖器)를 상징적(象徵的)으로 그려낸 것이다. 그래서 허신(許愼)도 "설문(說文)"에서 ‘야(也)는 여음야(女陰也)’라 하였다. 여기서 유의(留意)할 것은 야(也)가 단순(單純)히 여성(女性)의 생식기(生殖器)만을 상징(象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를 잉태(孕胎)한 어머니의 자궁(子宮)을 뜻한다. 이러한 흔적(痕迹)은 땅(土)은 만물(萬物)을 키워내는 어머니(也)라는 점에서 ‘땅 地(지)’, 물(氵)은 만물(萬物)을 키워내는 근원(也)이라는 점에 ‘못 지(池)’라 하였음을 볼 수 있다.

비석 갈(碣)의 구성(構成)은 뜻을 나타내는 돌 석(石) 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갈(曷)이 합(合)하여 이루어진 형성문자(形聲字)이다. 따라서 가첨석(加檐石)을 얹지 않고 머리를 둥그스름하게 만든 작은 비석(碑石)을 뜻한다. 성(姓)의 하나이다. 또한 갈(碣)은 비갈(碑碣)이란 말과 같이 쓰이는데, 비(碑)는 사각(四角)이며 갈은 원형(圓形)으로 분명한 형식이 없다.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의 낭사대각석(琅邪臺刻石)과 태산(泰山)의 산정(山頂)에 있는 무자석(無字石), 석고(石鼓),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등은 모두 갈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갈을 '특별히 세운 돌'이라고 하고 있다. 비의 건립기준은 품계(品階)에 따라 비의 크기와 종류(種類)를 구별하며 5품 이상은 귀부이수의 비로 5품 이하는 비좌원수의 갈(碣)의 형태로 구별(區別)하였고 이는 당나라의 제도(制度)를 도입(導入)해서 우리나라의 국가 사회의 제도로 정착(定着)된 것이다. 비의 분류(分類)는 비와 갈(碣)은 형태와 사용(使用)에 있어 구분이 있다. 그 모양이 편편한 사각이면 (四角柱)비라 하고 둥근것은 갈(碣)이다. 비는 가첨석이 있는 것으로서 비갈과 구분한다. 비는 가첨석인 개석의 모양과 대좌의 모양으로 신분(身分)을 구분하였다. 비와 갈(碣)은 묘주(墓主)의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형상(形狀) 높이 문장의 내용(內容)에 큰 차이(差異)가 있었다. 벼슬이 없을때는 학생으로 제액(題額, 비 앞면에 쓰는 글짜)을 새긴다.

돌 석(石)의 구성은 산기슭 엄(厂)과 돌덩이를 뜻하는 구(口)모양으로 이루어졌다. 즉 언덕이나 산기슭(厂) 아래에 굴러다니는 돌덩이(口)의 모양(模樣)을 본떠 ‘돌’을 그려냈다. 석(石)자는 언덕(厂) 아래로 굴러 떨어진 덩어리(口) 꼴을 본뜬 상형자(象形字)로 '돌(石)'을 뜻하는 글자이다. 일반적으로 석(石)자 부수로 쓰인 글자들은 "돌의 종류(種類), 재료 또는 성질(性質), 상태(狀態)"를 나타낸다. 그리고 이공학 분야(理工學分野)에서 접(接)하는 원소(元素) 중에 돌에서 채취(採取)한 물질(物質)이거나 상온(上溫)에서 고체 상태(固體狀態)인 "무기물질(無機物質)"의 명칭(名稱)은 대부분 석(石)부에 속하는 글자라는 것도 아울러 알아두면 원소명칭 및 성질을 기억(記憶)하는 데 도움이 된다.

鉅野洞庭

鉅野洞庭

(韓) 거야는 태산 동편에 있는 광야 동전은 호남성에 있는 중국 제일의 호수이다.

(簡) 넓은 들에 동네 집들이 모여 있다.

鋸野는 태山 동편에 있는 광야(廣野) 동정(洞庭)은 호남성에 있는 중국 제일의 호수(湖水)이다. 1.鋸野와 3.洞庭은 各各 2.태山東便의 廣野는 鋸野 4.호남성에 있는 중국 제일의 湖水는 洞庭이다. 클 거(鉅), 들 야(野), 고을 동(洞), 뜰 정(庭)

한자 유래

거야(鉅野)는 고대 중국의 유명한 큰 늪지대를 말한다. 이곳은 태산(泰山)의 동쪽에 있었다. 동정호(洞庭湖)는 호남성 북부와 양자강 남안에 위치한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담수호(潭水湖)이다. 팔백리(八百里) 동정호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크고 넓은 호수다. 얼마나 넓고 컸던지 동정호를 처음 찾는 사람은 이곳이 호수(湖水)인지 아니면 강(江)이나 바다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한다. 동정호는 호수 가운데에 섬이 많아 풍경이 아름답기로 이름이 높았다. 더욱이 호수 주변에는 악양루(岳陽樓)를 비롯한 명승고적이 많아 더 큰 유명세를 얻었다. 이백,두보등 많은 시인묵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곳이도 하다. 요즘은 양식 진주의 주산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곤지갈석(昆池碣石)이요 거야동정(鉅野洞庭)이라, 곤지와 갈석이 있고, 거야와 동정이 있다'는 고대 중국의 유명한 호수와 산 그리고 늪지대를 가리키는 말이라 하겠다.

클 거(鉅)는 거(巨)와 동자(同字)이고 어찌 거(詎)와 통자(通字)이다. 광물(鑛物), 금속(金屬), 날붙이 뜻을 나타내는 쇠 금(金) 부(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거(巨)가 합(合)하여 이루어진 형성문자(形聲字)이다. 즉 흙에 덮여 있는 광석(鑛石)인 '쇠'를 나타낸 글자이다. 각종(各種) 금속(金屬)과 관련(關聯)된 뜻을 나타내며 의미 요소(意味要素)로 쓰인다. 거(鉅)와 합자(合字)인 거야동정(鉅野洞庭)은 태산(泰山) 동편에 있는 광야(廣野)의 동정(洞庭)은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중국 제일의 호수(湖水)이다. 또한 거만(鉅萬)은 여러 만으로 셀 만큼 썩 많다는 뜻이다. 따라서 거제도(巨濟島)는 클 거(巨)와 건널 제(濟)가 만나 큰 섬(島)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구제(救濟)와 은혜(恩惠)의 고장을 상징(象徵)한다. 종래의 한산 섬 등 100개가 넘는 섬으로 많을 거(鉅)라는 뜻과 함께 거제 계룡 산하 구백만이라는 구전(口傳)에 따라 구제할 제(濟)라는 뜻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들 야(野)의 구성(構成)은 마을 리(里)와 줄 여(予)로 이루어졌다. 리(里)는 밭 전(田)과 흙무더기를 쌓아놓은 모양(模樣)을 상형한 흙 토(土)로 구성되었다. 일정한 농토(田)를 중심으로 흙(土)을 쌓아 올려 줄지어서 집을 짓고 산다는 데서 ‘마을’을 뜻하게 되었다. 여, 나 여(予)에 대해 허신(許愼)은 "설문(說文)"에서 “여(予)는 밀어서 준다는 뜻이며 서로서로 내밀어 주는 모양을 본떴다”라고 하였다. 즉 베틀에서 베를 짤 때, 방추(紡錘)로 날줄을 먼저 매고 또 다른 실을 감은 북을 좌우로 오가게 하며 옷감을 직조(織造)하는데 바로 그 북의 모양을 본뜬 것이다. 북을 좌로 ‘주고’ 우로 ‘주기’ 때문에 ‘주다’라는 의미(意味)를 부여(附與) 했으며, 후에 ‘나’라는 의미로 가차(假借)되었다. 따라서 野(야)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을(里)에 사는 사람들에게 곡식은 물론 땔나무 등 많은 것을 안겨주는(予) 드넓은 땅이라는 데서 ‘들판’을 뜻하게 되었다. 들 야(野)자는 '땅(土) 위에 밭(田)이 있는 곳이 들이다'는 뜻이다. 이후 '들 야생(野生)의 시골, 범위' 등의 뜻이 생겼다. 예전에는 떳떳하지 못한 관계의 남녀가 보리밭에서 만나 정(情)을 통(通)했다. 야합(野合)은 '들에서(野) 만나다(合)'는 뜻으로, '부부(夫婦)가 아닌 남녀가 보리밭과 같은 들에서 만나 정을 통하다'는 뜻이다. 이후 '좋지 못한 목적(目的)으로 서로 어울리다'는 뜻이 되었다. 야구(野球)는 '들(野)에서 하는 공(球)놀이'이다. 야채(野菜)는 원래 '들(野)에서 자란 나물(菜)'이지만, 무, 배추, 시금치 등의 심어서 가꾸는 나물도 된다. 수영야유(水營野遊)는 '수영(水營)의 들(野) 놀이(遊)'로 부산의 수영 지방에 전승(傳承)되고 있는 탈놀이다. 모두 4마당으로 되어 있는 양반에 대한 풍자극(諷刺劇)이다. 분야(分野)나 시야(視野)에서는 범위(範圍)라는 뜻으로 사용(使用)된다.

골 동(洞, 밝을 통)의 구성(構成)은 물줄기가 갈라지고 합해지는 강을 본뜬 水(수)를 간략히 세 개의 물방울로 표시한 수(氵)와 한 가지 동(同)으로 이루어졌다. 동(同)은 갑골문(甲骨文)에도 보이는 자형(字形)이지만 통일(統一)된 해석(解釋)이 없다. 인문적(人文的)인 접근(接近)을 한다면 대나무와 같이 속이 텅 비었음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마디마디를 절단(絶斷)해도 거의 한결같은 크기라는 뜻이 내포(內包)되었다고도 볼 수 있고, 또한 한 무리(冖)의 사람들이 모두 한(一) 목소리(口)를 낸다고도 보아 ‘한 가지’ ‘함께’ ‘다같이’ 등의 뜻이 발생(發生)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자연적(自然)으로 생긴 동굴(洞窟)을 의미(意味)한다. 따라서 동(洞)의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식수(食水)로 삼을 수 있는 물(氵)이 있는 동굴(同)에서 사람들이 모여 산데서 ‘고을’ ‘마을’을 뜻하였으며, 아울러 ‘동굴(洞窟)’이란 뜻과 함께 ‘밝다’는 의미(意味)로 쓸 때는 ‘통’으로 발음(發音)한다.

뜰 정(庭)의 구성(構成)은 집 엄(广)과 조정 정(廷)으로 짜여 있다. 엄(广)은 지붕은 있지만 사면의 벽 중 일부는 애초부터 쌓지 않고 개방(開放)한 차고(車庫)나 조정(朝廷)의 건물(建物)을 말한다. 정(廷)은 길게 걸을 인(廴)과 곧을 정(壬)으로 구성(構成)되었는데, 인(廴)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신발을 끌듯이 차분하게 걷는 것을 말한다. 베틀을 상형(象形)한 임(壬)과 현재(現在)의 자형(字形)이 같은 정(壬)의 갑골문(甲骨文)을 보면 우뚝한 땅(土)위에 서있는 사람(亻)을 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반 가정(家庭)과는 달리 정사(政事)를 보는 조정(朝廷)은 돌이나 흙으로 축대(築臺)를 높여 건물(建物)을 조성(造成)하였다. 그래서 높게 조형(造形)된 뜰(土)을 느릿한 발걸음으로 거니는(廴) 사람(亻)들이 있는 곳으로 ‘조정(朝廷)’이나 ‘관청(官廳)’을 뜻하게 되었다. 따라서 정(庭)의 전체적인 의미(意味)는 개방형(開放形) 건물(广)이 늘어서 있는 지대(地帶)를 높여 지은 조정(廷)의 뜰을 말한 것이었으나, 일반 가정(家庭)에서도 배수(排水)가 잘 되게 지대(地帶)를 높여 ‘뜰’을 조형(造形)한데서 ‘집안’이나 ‘뜰’의 뜻으로 확대(擴大)되었다.

  1. 鉅 : 巨(클 거)와 同字이다.(≪註解≫)
  2. 鉅野 : 鉅野는 郡과 澤으로 나타난다. 王莽 때에 鉅野郡이 된 적이 있으나, ≪千字文≫ 본문은 池ㆍ山ㆍ澤ㆍ湖를 제시한 것이므로 澤으로 풀이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3. 昆池碣石 鉅野洞庭 : 昆池는 바로 滇池이니, 일명 昆明池이다. 碣石은 산 이름이다. 鉅野는 늪 이름인데 지금은 이미 말랐다. 洞庭은 호수 이름이다.(≪釋義≫)
  4. 漢武欲通雲南 : 鑿昆明池의 설명을 참고하면 通은 雲南을 정벌하여 소통함을 뜻한다.
  5. 鑿昆明池 : 長安에 운남의 昆明池를 본떠서 못을 판 것을 말한다. 漢나라 武帝가 판 昆明池는 지금 西安府 성 안의 上林苑 속에 있다. 무제는 昆明의 夷族을 정벌하려 하였는데, 그 나라에 滇池가 있어서 마침내 못을 파서 본떠서 수상 전투를 연습하였으니 주위가 40리였다.(≪山堂肆考≫ 卷24 〈地理 池〉)